12/20/2010

남자친구 이야기 (2)

너희 가족들이 불편해 하지 않겠냐, 정말 내가 가도 괜찮겠냐 하고 전화로 거듭 확인 했지만 오히려 혼자 바르샤바에 있으면 우리 엄마가 더 마음 아파 한다며 이미 말 다 해놨고, 가족들로부터 적극 대 환영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래..... 가보자 하고 마음을 굳혔다.

약 3시간 반 기차를 타고 도착하니 지금의 남자친구가 기차역에 마중나와 있었다.
깡총깡총 뛰듯이 달려와 가방을 들고는 나와 차를 타고 마을을 보여줬다. 작은 마을이고, 대학교가 있고 여기서 대학교까지 마쳤고 등등의 간단한 얘기와 함께 차를 타고 달리길 약 10여분, 아주 작은 마을이 나왔다.
동화속에 나올 것 같은 작은, 발음하기 매우 힘든..... 그런 작은 마을에 몇년 전 집을 지어 이사왔다고 한다.
집도 너무나 예쁘고, 마당도 넓고.... 아무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는데 후덕해보이는 두분이 나를 반겨주셨다.
이 때 바로...Czesc 하고 인사를 하셨던게 기억난다.
나는 안절부절.... 방으로 안내해 주시길래 2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구경하고 내려와 함께 식사를 했다.  멀리 보이는 숲이 우리들의 '바다'라며 영어를 하시는 아빠가 말씀해 주셨다.
역시나 내 한국이름은 발음하기 힘든지.... 몇번을 반복하시다 그냥 Sofi로 통일하기로 했고....
(아빠는 아쉬운지 계속 혼잣말로 연습을 .....)
즐겁게 얘기하며.... 이 때의 대화는 영어를 잘 못하시는 엄마로 인해 바디랭귀지 + 나의 짧은 독일어 단어들의 나열 + 러시아어 단어와 문장 남발 + 역시 짧은 폴란드어 단어 나열 이후 지친 나의 영어 드립, 지금의 남자친구의 통역으로 이뤄진 끝내고 나니 엄청 피곤한....그런 대화였다.
밥먹고 산책을 나가 (추워 죽겠는데!! 하지만 집에서는 더이상 할 일도 없고!!) 동네도 둘러보고... 사탕 가게가서 사탕도 사줬다. 헤헤

그리곤 도착한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바로 형네 집으로 고고~
그 집에는 형, 형수, 조카 둘, 사돈 엄마, 형수의 오빠, 형수의 오빠의 아내, 그들의 아들까지...
완전 복작복작.... 다들 너무나 반겨줘서 깜짝 놀랐다.
사족이지만..... 쪼끄만 조카들이 있는데 큰애는 금발 머리의 패트릭.... 폴란드식 발음으로는 빠뜨릭, 작은 빠뜨릭이라는 의미에서 빠뜨리첵 하고 부른다.
작은 아이는 나와 같은 이름의 소피아, 폴란드식 발음으로는 조피아, 역시 작은 조피아라는 의미로 소시야 라고 부른다.
부모는 짙은 갈색 머리인데 두 아이다 금발, 크면서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남자친구의 아빠가 금발이므로, 그대로 있을 가능성도 있다.

다행히 형 + 형수 및 형수의 오빠 내외 및 조카는 영어를 잘해서 나름 이것 저것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나중에 '나 누구라고 소개 했어? ' 하고 물어보자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고 한다.  '_'a
역시나 배 터지게 먹고.... (폴란드의 명절은 먹고 마시는게 다임 엄청 먹고 엄청 마심) , 배불러 죽겠는데 이 때까지도 전혀~~ 로맨틱한 부분이라고는 없었고, 그냥 웃고 떠들고 한게 다다.

와인을 두세잔 마셨더니 알딸딸 하게 취기도 올라오고 해서.... 앉아 있는데 지금의 남자친구가 밖에 산책을 나가자고 함.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는 따라 나가는데 급 엄마가 따라와서 핑크색 넥 워머를 둘러 주시는게 아닌가!! 급 감동!! 하고 쫄래 쫄래 따라 나와 동네를 걸으며 얘기를 하는데, 다시 '왜 항상 Yes라고 말하는 사람이 좋아?' 하고 물어보길래 그냥~ 하고 대답했더니 본인이 늘 Yes라고 대답해 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난 괜찮아~ 그건 그냥 이상형일 뿐이야 라고 했더니 급 본인이 Yes 라고 늘 대답해 주는 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게 아님?  그래서 순간 당황한 나.... 아니 근데.. 그건 그냥 한 얘기고 나는.... 하고 얼버 무리는 데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한쪽 무릎 까지 꿇고 보는 데 도~~저히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술마셔서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헉.... 연애는 시작할 때 초반에 딜을 잘해야 되는데.... 하는 (야비한) 생각으로.... '그럼 너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도 나한테 절대 화내서는 안되고, 무슨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줘야 하고, 무슨일이 있어도 나에게 절대 큰소리 내서는 안된다' 고 했더니 .... 그 때 뭐가 들렸겠냐마는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하길래 그럼 나도 알겠다고 하고..... 그때부터 연애가 시작 되었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길어야 삼개월이라고 생각했다.

뭐.... 지금까지 올꺼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벌써 1년

공기가 차갑다.
코로 숨쉬기가 힘들어서 무의식적으로 입으로 숨을 쉬었더니 목이 부어서 일주일간 고생 했다.
올해 남은 휴가는 6일, 24일 금요일부터 휴일이니 다음주 5일을 휴가 냈다. 모두 합쳐 거의 10일간의 휴가를 보내기 위해 야근도 불사하며 올해를 정리하고 있는데, 사실 고생은 우리팀 팀장이 거의 다 하는 것 같다...



지난 1년 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직장인의 삶은 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다. 물론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만, 밖에서 보는 높아진 한국의 위상과는 달리 고생하는 한국 사람들의 개개인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외국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후....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 보다는 일이 먼저, 개인적인 일은 뒤로 미루고 일과 회사를 우위에 두는 나의 태도에 대해 갈등 하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선 그런 내가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태도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
이 안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수 해서 약점 잡히고 싶지 않다' 도 함께 존재 한다.
다른 사람이 말끔히 처리하지 못한 일 뒷처리를 하느라 고생할때면,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가정일로, 개인적인 일로 중도에 그만 둔 일을 받아 처리하며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할 때면 나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늘 하곤 했었다.그런데 의외로 다른 사람들은, 뿐만 아니라 우리 팀 팀장 또한,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다. 팀이라는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여기서 깨달았다.
서로 내가 더 잘나려고, 견제하고 시기하고 못하면 험담하려는게 아니라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 주고, 힘들때나 문제가 생겼을 때 도와주려고 존재하는 거구나.... 하고....

한국에서 일 할때는 감정이 무척 많이 소모 되었었다.
일도 많았지만,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봐야 했었고 때문에 감정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한마디에 나를 원수처럼 대하던 사람도 있었고 업무적으로 수정 요청을 했을 때 무척 기분 나빠 하며 나를 예의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고, 먼저 인사하고 말 걸는 내 성향을 꺼려해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무척 많았다. 생각해보면 곳곳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산재 했다. 늘 둥글게 살려고 노력 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또 다른 적이 생겨, 때때로 가슴 한쪽이 너덜너덜해지곤 했다. (물론 적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 같은 경우 사람들의 반응이 호불호가 굉장히 분명한 듯)

하지만 폴란드로 오고 난 후, 회사의 감정 소모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문제가 생겨 일에 대해 다른 견해를 피력하며 수정 요청 메일을 보내던 날.... 은근히 고민을 했었다. 뭔가 하얀 도화지 위에 새로 잘 써내려 가다 실수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마음 속으로 준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돌아 오는 건 웃는 얼굴과 아침 인사였다. 바꿔 봤는데 그건 좀 괜찮을지 모르겠다며 메일 보고 다시 얘기 하자는 말에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그리고 또 그 다음, 심지어는 GA에서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다른 직원과 함께 프로젝트 정리를 하다 참고 또 참고 너무 시끄러워 정말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미안한데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바로 너무 미안 하다며 자리를 옮기는 그 들을 보며.... 아...이번에야말로 적이 생기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후로 반년.... 그녀들은 아직도 너무나 친절하고 그들은 너무나 매너남이다...   어찌 아니 감사할 수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싫은 소리 한마디 없지? 어떻게 저렇게 웃으며 계속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고 나와 일을 하지? 분명히 싫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 1년 쯤 지나고 폴란드에 익숙해질 때 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들 문제가 생겨도 책임을 진다거나 책임 소재를 따지기 보다는, 수정하면 되지...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점 때문에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부정적으로  받아 들일 필요도 없고 쓸데 없는 감정 소모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덕분에 나 또한 일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중대한 문제가 아닌 경우,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기듯 요청하고는 재촉하기보다는 좀 더 일찍 준비해서 실수가 발생 했을 때도 대처할 수 있도록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할까?  그러니 딱히 얼굴을 붉힐 일도, 감정이 상할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단.... 폴란드가 구 공산권 국가라서인지 모든 행정처리가 굉장히 늦게 이뤄진다. 믿을 건 못 되지만, 슬라브권 문화가 한템포 느리다는 말도 있고.....
언제나 적정한 시간적, 마음적 여유를 가지고 임해야지 빨리빨리는 잘 통하지 않는다.
이 점을 명심하고 대하면 어떤 일이든 그닥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성향 때문에 발행하는 단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빠른 의사 결정 같은 단어는 찾아 보기 힘듬, 명령이라는 단어도 거의 존재 하지 않음, 따라서 서열이 없는 대신 대접 받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연구소의 600명을 대표하는 DIRECTOR가 아침에 커피 잔을 씻어 커피 뽑으려고 내 뒤에 서 있는 것을 볼때나, 그럼에도 비키지 않는 나를 볼 때.... 참으로 묘한 느낌이..... 나이 든 사람들은 적응하기 정말로 힘들 것이답.)

반면에 한국 사람들과 일할 때 느끼는 점은..... 글쎄....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일까?  다들 굉장히 적대적이다.
우리가 조금의 실수라도 하면 전사의 임원들까지 볼 수 있게 메일을 넣어 힐책 하면서 본인의 실수에는 관대했고 곧잘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럴때면 폴란드에서 폴란드 사람과 일하는 한국인인 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르곤 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쓴 웃음만 지을 뿐.....  (하지막 역시나 빠른 대응과 즉각적인 일 처리는 환상적임)

재미 있는 점은 그러한 삶의 자세가 바로 한국 사람의 열정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생각 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더 실감하게 되는 한국의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의 배경에는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 사람의 기질이 일정 부분 작용하고 있다. 한국사람들의 삶에는 기본적으로 잘하고 싶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 설사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갈 지라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유럽에 나와 내가 느낀 한국인과 유럽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

고속도로를 짓는 대 공사가 진행중인데도, 고속도로를 빨리 지을 수록 국가적으로 큰 이익이고 개인적으로도 생활 수준의 향상이 예상 됨에도 불구하고 내 집 근처에 도로가 나면 시끄럽고 차가 많이 다니는게 싫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고, 또 그 소송으로 인해 몇 개월씩 공사가 지연 되는 대도 개인 개인의 권리를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 지고 있는 이 곳, 덕분에 EU 발전 기금 조차도 철회 되는 상황에서 국가 조차도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상황을 받아 들이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언제나 빨리 빨리 돌아가는 한국사회에서 25년을 살았다.
빨리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가 한발자국 늘 떨어져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했다. 항상 이방인처럼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웃고 떠들며 살았지만 언제나 진지하지 못했다. 나는 내 삶에 대해서도 한번도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부족한 현실감 때문에 크게 상처 받은 적도 없고, 크게 행복했던 적도 없었고 크게 힘든 일도 없었다. 그냥 그게 뭐 어때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곤 했다. 어딘가가 심각하게 결여 되어 있다고는 인식 했지만, 한국 사람 치고 정신 건강이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하고 스스로를 위로 하곤 했다. 주변 신변에 관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제와서 가족들 문제를 걸고 넘어질 생각은 없다. 문제 없는 어린 시절, 행복한 가정 생활은 나 또한 일부분 가졌던 것들이고, 부모와의 문제, 힘들었던 어린 시절 같은 건 어느 누구나 경험 했던 삶의 한 부분일 것이라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한국 사회를 떠나 진정한 이방인이 되어 온전히 두발로 땅에 섰던 건 아이러니 하게도 높디 높은 상공 위,  2008년 2월,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다.
나는 늘 혼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꿈에 대해 친구들과 얘기 하던 때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틀어 박혀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다 라고 대답했던 내 꿈이 2008년에 일정부분 현실이 되었다. 그 해 6개월 간 내가 만난 한국인이라고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소수였고,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산책을 하거나 지중해의 가슴이 시리도록 파랗고 맑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수건 한장 깔고 업드려 음악도 듣고, 독서도 하며 하루하루를 채워 나갔다. 물론 밤에는 종종 친구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정말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속박도, 바쁜 스케줄도, 의무도 없는 그 곳에서, 그 제서야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내 삶이고, 나는 행복해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순간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나는 하루 하루를 정말 충실히 살았다.
가슴 아픈 사랑도 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낸 후,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졸업 후 취직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나는 또 다른 나의 모습과 조우 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은 중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 예전에 지극히 비 현실적인 이성의 소유자였다면, 그 때의 나는 너무나 현실적인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잡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편에서는 예전의 나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전의 내가 구름위를 걸어 다녔다면, 그 시점의 나는 점점 메말라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쪽도 바람직 하지 못했던 건 맞지만 적어도 그 때의 나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립하여 있었기 때문에 문제라고는 인식 하지 않았다.
단지 가끔씩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 될 뿐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때의 고민들이 내가 한국을 떠나 이 곳까지 오게 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막상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던 때는 달리 외국에 나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이미 헤어진 지 일년이 되어 가던 시점이라 영국으로 전 남자친구를 보러 가겠다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별 다른 생각 없이 그냥 하루 하루 살고 있을 무렵, 생각치 못했던 전화가 왔다.

점심 먹고 나른하기만 한 2시 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와 받을까 말까 고민 하던 때도 생각나고, 회사 비상구 계단에 앉아 통화 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같은 거창한 목표도 없었다. 단지 딱히 가지 않을 이유가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이유가 있었을 뿐이라 단지 그것만으로는 안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노력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회였고, 알수 없는 예감 같은게 조금 있었다. 뭐랄까..... 신앙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게 안배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랄까?

딱히 찾아 볼 필요도 없었던 해외 취업 그냥 별 생각 없이 본 면접, 그런데 합격 통보와 함께 비자 준비가 곧바로 들어간 상태라 만화책에서나 봤던 운명의 수레바퀴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국을 떠났다. 그렇게 막연한 느낌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