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2012

Story about 인연



In 1967, Pham Ngoc Canh, 18, was sent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to study chemical mechanics at the Hamhung Chemistry and Industry University. Hamhung is the second largest city, an important chemical industry center in the DPRK and the capital of South Hamgyŏng Province.

After four years studying at the university, in 1971, the Vietnamese man began working as an apprentice at a fertilizer factory in Hamhung, where he met a girl named Ri Yong Hui, who worked in the analysis division.

One day, Ri Yong Hui noticed someone was looking at her through the window. That was Pham Ngoc Canh. From this eye contact, they fell in love, which they didn’t think would continue for 31 years.

They loved each other in secret because the DPRK’s law at that time didn’t allow Korean girls to love and marry foreigners. The society didn’t support such relationships.

Two years later, Canh had to return to Vietnam.
“I will wait for you forever,” Ri Yong Hui promised. She was ill for months. She even tried to commit suicide but her mother rescued her in time.
Several months later, Ri Yong Hui received the first letter from Vietnam. The letter was not for her but for her mother and the sender was “Pom Noc Kieng”, a Korean girl. They couldn’t write each other as lovers, and could only ask “Are you all right?” “I wish you will always fulfill your assigned missions” or “Is Hamhung snowy this winter?”

Those “dry” words were the breath of life for Ri Yong Hui. She read the letters hundreds of times and burnt them afterwards for fear that someone would discover their relationship. In Vietnam, Ri Yong Hui’s letters became Canh’s treasures.

In 1978, Canh was sent to DPRK again to attend a 3-month training course. He had to disguise himself to see Ri Yong Hui. The situation didn’t impove. As his course was nearly finished, Canh wrote a letter and managed to send it to the chief of the DPRK Women Union to present their case. However, Ri Yong Hui prevented him from sending the letter because she knew that was hopeless. “Let’s go home! I will wait for you forever,” she told Canh.
Returning to Vietnam, Canh became enthusiastically involved in all activities related to the DPRK, including raising funds to assist DPRK people. He then became the permanent member of the Vietnam-DPRK Friendship Association.
The couple still wrote to each other until 1992, when Canh received the last letter from his girlfriend. His efforts to find her all failed.
In 1997, Minister of Foreign Affairs Nguyen Manh Cam paid a visit to the DPRK. Canh wrote a letter and directly saw the Minister to ask for help. Mr. Cam agreed and brought the letter to the DPRK. After that, the DPRK Embassy informed Canh that Ri Yong Hui got married.
Canh didn’t believe this because if she wanted to get married, she would have done so many years earlier.
At that time, Canh moved from the General Department of Chemistry to the Hanoi Department of Sports and Physical Training as an interpreter for DPRK taekwondo coaches, to get information about his girlfriend.

In 2001, he was informed that Ri Yong Hui died of sickness ten years earlier. But his friend, Park Sang Kim, an interpreter for DPRK high-ranking delegations to Vietnam, went to Hamhung to look for Ri Yong Hui. He discovered that the woman was still healthy and still loved Canh.

Canh was very happy and he still waited for a chance which came in May 2002 when a Vietnamese high-ranking delegation visited the DPRK.
Canh wrote a letter and sent it to some members of the delegation, asking for their assistance. Shortly after, Canh suddenly received a document of the DPRK authorities that allowed him to marry Ri Yong Hui.
He immediately prepared the wedding and fulfilled the necessary procedures to go to the DPRK. On October 1, 2002, he arrived in Pyongyang. Several days later, Ri Yong Hui arrived too. The 31-year love had a happy ending.
They came back to Vietnam and the wedding ceremony was organized on December 31, 2002 in Hanoi. At that time, the groom was 54 and the bride was 55.

Thanks to the media, some brothers and sisters of Ri Yong Hui from South Korea learned about the couple and went to Hanoi to see Ri Yong Hui.
VietNamNet reporter visited Mr. Canh and Mrs. Ri Yong Hui in late 2010. They live in an apartment in Hanoi. Mr. Canh retired while Mrs. Ri Yong Hui taught Korean at a foreign language center.
Mr. Canh said that they returned to the DPRK by train from Beijing in November 2010. They prepared many gifts, from electric torches to clothes and shoes. Though the couple could only stay in Pyongyang, Mrs. Ri Yong Hui was very happy to return home.

Officials at the Vietnamese Embassy in Pyongyang told them that many people from Hamhung city asked them about Ri Yong Hui and her now legendary love story.





"처음 그녀를 보고 내 아내가 됐으면 좋겠다 생각했지요."

1971년 북한 평양에서 유학하던 베트남 남성 팜 녹 칸씨는 비료 공장에 다니던 북한 여성 이영희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 이씨는 한 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이들은 북한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몰래 사랑을 이어갔다. 유학 일정이 끝난 칸씨는 홀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씨를 향한 사랑은 베트남에서도 계속 타올랐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마음을 나눴고 칸씨는 베트남 스포츠팀 통역 담당으로 일을 하며 북한을 몇 차례 방문했다. 칸씨는 이씨를 베트남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92년 이후로는 이씨의 서신마저 끊겼고 북한 당국은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 "사망했다"고 거짓말하며 포기하게 했다.
그러나 칸씨는 이를 믿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 국가주석, 외교부와 접촉해 끈질기게 설득하는 등 정성을 쏟았고 마침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씨를 베트남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2002년, 이들은 하노이에서 7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칸 씨는 54세, 이씨는 55세였다. 당시 이 소식은 국내외 언론에 소개돼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그러다 14일(현지시간) 영국 BBC가 현재 60대 노부부가 된 이들의 근황을 전했다. BBC는 이들의 현재 사진을 공개하며 "노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길을 걷거나, 칸씨의 낡은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다니는 모습을 하노이에서 종종 볼 수 있다"고 전했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소개된 이들의 운명 같은 러브스토리는 전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씨는 최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연애하고 재회하기까지 30년이 넘었고 이제는 할머니가 다 됐다(웃음)"며 "1년 반 정도 연애를 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못 가졌지만 사랑이라는 게 마음대로 안됐다"고 말했다. 또 "30년 동안 이 사람은 장가도 안 가고 나한테 계속 편지하면서 그렇게 30년을 보냈다"고 전했다.

 

 
 
담담한 듯 흘러가는 일상 생활에서 가끔 별똥별 처럼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세상 얘기 인것 같기도 하고 소설 속 얘기 같기도 하지만.....  이 사람들의 한 해 한 해는 어땠을까 나도 모르게 앉아서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어 기사가 좀 더 로맨틱하게 얘기에 접근한 느낌.....
마지막에 두 부부가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수 있다는 부분이 좋더라...하는 잡설

2/13/2012

나도 글을 좀 잘 (자주?) 썼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글을 써서 블로그에 포스팅 하는 걸 볼때면 기분이 참 묘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는 일에 시간을 쏟는 그 사람들의 모습에 존경심도 들고.... 아니 어쩌면 나 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 걸지도......
그 동안 먹고, 보고, 느낀 것들을 잘 정리했다면.....  참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을텐데....
개인적인 생활과 생각들이라 나누기 꺼려져 쓰지 않은 이야기도 있고,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음식 사진 찍는 건 습관이 안 들어서 인지 자꾸 잊어 버리고 안 찍는 것 때문에 음식 사진은 원래 부터 올리지 않기로 생각 했었고....
풍경 사진은 찍고 나면 항상 구도가 마음에 안들어 기억을 추억하는 용으로만 쓰는게 거의 1대부분이라 내 블로그가 이리도 황량한지 모르겠다.

사실 마음에 담아둔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남을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는 내 행동들에 대한 반성, 누군가의 말로 인해 아파하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단상들을 소소하게 풀어내고 싶었는데, 항상 글쓰기란 내게 그리 쉽지 않은 영역인것 같다.
주절주절 써내려가기란 쉽지만 어느 순간 주제도 모호해지고 처음에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흐려져 알수 없는 잡담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때문에
개인적인 일기나 편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가 아닌 이상.... 쉽게 글을 시작하기가 쉽지가 않다.
머릿속에서 몇일을 다듬다 보면 어느새 바쁜 일상에 밀려 간절했던 마음과 생생하던 느낌은 어느새 바래져있다.
이미 성큼 멀어져 버린 느낌들을 잡아다 글을 쓰기엔 마음이 또 내키질 않아 떠나보내길 여러번.....


인생에서 내가 이렇게 놓쳐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12/25/2011

테니스

초등학교 다닐 때쯤... (우리 때는 국민 학교라고 했었는데.... )
집 바로 앞에 종합 운동장도 있고 맞은 편 공원 근저리에 테니스 장도 있어서 아직 시집 안간 우리 둘째 이모는 자주 우리 집에 들러 나랑 운동을 다니곤 했다.

나는 유치원 대신 유아 체능단을 다녔고, 아직은 기운이 팔팔 했던지라.... 달리기를 제외한 다양한 체육 종목, 피구, 볼링, 수영, 스케이트, 배드민턴 등의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운동을 좋아하시던 이모와 쿵짝이 잘 맞았다.
아..... 지금은 비루하기 그지 없는 실력 + 체력을 자랑하지만.... 그땐 그랬다.
그렇게 이모를 따라 근 2년간은 테니스를 배웠다. 겨울에는 한강 수영장에 스케이트장이 설치 되곤 했는데 겨울에는 그렇게 스케이트를 타고 여름에는 테니스도 다니고 수영장도 다니며 운동을 마친 후엔 이모랑 매점에 앉아 도시락 라면을 호호 불어 먹곤 했다. 그땐 그렇게 좋은줄 모르고 마냥 이모가 좋아 따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소중한 보물 같은 추억이다.

예전에 누군가에게도 말했지만..... 어린시절에 받았던 사랑은 커서 세상을 살아갈때 큰 힘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사랑 받고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이모와 삼촌들께 받았던 사랑이 아직까지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서른이 가까워지며 이제는 내가 예전의 이모 나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이모가 너무나 그립고 생각이 자주 난다.
살아 계셨더라면 만나볼수도 있을 것을..... 돌아 가시기 전에 나는 딸보다 우리 상아가 아직도 더 예쁘다고 말씀 하셨던 그 말만 머리에 남아 자꾸만 맴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 가실걸 알았다면 더 자주 찾아 뵐껄.... 그렇지 않아도 본인 삶의 무게 때문에 내게 먼저 손 내밀기 힘드셨을텐데..... 하는 후회와 슬픔이 가슴에 남아 자꾸만 이모와 갔던 곳, 이모와 함께 했던 것들을 찾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이모와 함께 다녔던 테니스를 다시 꼭 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 나이가 딱 이모가 나를 데리고 다니시던 그 나이다......) 근 반년이 넘게 생각만 하고 막상 시작하기가 힘들었는데, 회사에 부장님께서 테니스를 가신다고 하길래 따라 나섰다.
예전에 볼링을 4년만에 쳤을때 왜 이렇게 점수가 안나던지.... 역시 손 놓으면 감이 떨어지는 구나... 하고 생각 한 적이 있었는데 스쿼시나 수영, 자전거 같은 경우는 몇 년 쉬어도 금새 따라가길래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어머나 이게 왠 일.... 테니스 코트에 서서 날아 오는 공을 치려는데 폼도 기억이 안나고 공도 완전.... -_- 아아 괴로워 ㅠ.ㅠ
쳤다는 말이나 말 것을....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쳐 본 이후 라켓을 잡은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스쿼시는 나름 자주 쳤는데... 헉 이게 정말 왠일.....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 말도 나오지 않고 아.... 레슨 받아야지... 하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도대체 옛날에 어떻게 쳤는지 기억도 안나고....
아니 내가 친게 맞나? 싶고.... 도대체 내 2년간의 시간과 노력은 무었이란 말인가....
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건가? 아니면 내가 늙은건가.... 하는 생각이 감정이 복잡했다.
(같이 가신 부장님도 황당해 하시는 것 같았음 )

그렇게 테니스를 치고 같이 갔던 부장님, 상무님, 책임님과 부장님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는데 옛 생각이 많이 났다.

아.... 지금 이모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모랑 같이 주말에 테니스 치고 맥주 한잔 했을텐데....
여행을 좋아했던 우리 이모.... 살아 계셨더라면 폴란드에도 오시라고 해서 같이 여행도 하고
나랑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눌수 있었을텐데..... 
상아가 조금만 크면 나랑 맥주 한잔 시원하게 하자며 웃으시던 우리 이모.... 나도 항상 내가 크면 우리 이모랑 남자 얘기도 하고 사는 얘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소망은 이제 절대 이루어질수 없는 꿈이 되고야 말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나저나 테니스는 진짜 레슨 좀 받아야지...
이건 진짜 초보도 왕 초보다.
어디가서 쳤다는 말하기가 창피한 정도.... -_-

12/11/2011

근황

아.... 이럴꺼면 블로그를 왜 시작했을까...
별로 보는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방치하는 건.... -_-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막상 그때는 왜 이렇게 시간이 안가나.... 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딱히 글을 쓸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데, 그냥......그렇게 시간이 기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안부를 묻고 싶었던 사람도 많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연락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로 시간이 한참 흘러가 버렸다.

간략히 그동안의 일을 말하자면..... 다시 직장에 복귀했고, 새로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했고, 그리고....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올해 바르샤바의 겨울은 너무나 온난하다.
처음 맞았던 겨울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12월, 길에 눈이 쌓여 걷기가 힘들어 고무 장화를 샀더랬다. 그때....해가 뜨지 않는 몇개월을 보내고 처음으로 해를 본게 4월이던가?
그랬는데.... 어제 오늘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마음이 송구스럽기 그지 없다....

'이....이건 우울해 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야!! '라고 생각하려고 노력도 하고....
주말을 6월에 있을 시험 준비로 인한 수업으로 보내야 하는 나에 대한 선물이라고도 애써 생각했다.
공부할게 너무나 많고..... 또 나는.... 기본적인 개념을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매우 매우 이해력이 딸리는 학생이다. 일주일에 최소한 10시간은 혼자 공부해야 붙는 시험이라는데....
아아아아아..... 통과를 해도 걱정인 것이....  1차 시험은 지금 하는 일과 그렇게 동떨어진게 아니지만,  2차부터는 향후의 커리어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할 정도로 특화된 시험이라....
지금 모시고 있는 부장님을 끝까지 ( 영원히가 아니라.... 그...분의 임기를 채우겠다는 의미임....) 모시겠다는 의지....를 실현 한 다음의 행보가 고민이다.
하지만 요건 사실 지금할 필요는 없는 고민이시라..... 당장은 이 친숙하지 않은 단어, 개념, 공식을 파악해야할 때다....

아... 그런데 오늘 강사님 너무 멋지시더라.... 당황하면 말 좀 더듬으시던데.....
능숙하게 문제를 풀어 나가는 모습....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쳐다 봤다는.....  -_-
전에도 엑셀을 능숙히 다루는 부장님의 모습을 볼때나 SAP를 능숙하게 돌리는 차장님의 모습을 보고..... 아! 좋은 분이야.... 라고 생각이 들었던 걸 보면.... 역시 나는 능력자에게 약한 것 같다. 그러고보니 얼마전에도 회사 언니가 라우터를 설치해 주시는 걸 보고 (설명서대로 했는데도 설치를 못하는 기계치) 언니!!!!!! 이러면서 언니에게 이글아이를 보냈다는......
그렇지만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능숙하게 다루시는 분을 볼때는.... 별 감흥이 없다.
이건 뭥미???? 하는 떨떠름한 느낌....

오늘 그 분께서 계산기가 당신의 절친이 되길 바랍니다.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라고 말씀 하셨을때는 그 분의 계산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다 -_-  (하지만 오른손 약지에는 반지가 번쩍번쩍)
선생님이 멋지거나 멋있는 학우 (단어에서 오묘한 어감이 느껴지지만) 가 있으면 수업이 즐겁고 엄청난 동기가 부여되는데....

아 이 시험 정말 열심히 공부 할 것 같다....... (통과여부에 대한 감과는 거리가 멀다능....)

10/05/2011

여유

갑자기 일을 놓고 집에 들어와 앉으니 숨겨져 있던 게으름이 끝도 없이 방출되고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지는 것 같다.

당장 독일어 공부를 해야 하고 GMAT시험도 봐야 하고.... 이미 점수가 만기된 토익도 봐야 하니 연습 문제라도 한번 풀어 봐야하고.... 폴란드어 그 동안 공부한 것들이 적지 않은 양이니 정리하고 입으로 자연스럽게 나올수 있도록 연습도 해줘야하고....기타 등등 계획 했던 것들도 많고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날 감시하던 (?) 팀장의 눈초리가 없고......   감시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면....-_-

한없이 풀어져 빈둥빈둥 놀다가 커피 마시고 테레비보다 목욕하고 소파에 누워 하늘 쳐다보다가 독일어 책 피고 좀 보다 30분도 안되서 인터넷 하고...

아... 이게 뭔 호사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건......
초등학교 시절 ( 나 다닐때는 국민학교 였음) 난 참 시계 부분에 약했다.

왜 그랬을까.... 항상 산수 시험에서 시계 그림만 나오면 그냥 짜증이 나고..... 잘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나이를 먹고도 똑같이 폴란드어로 시계 부분을 이렇게 못하는지....  사람은 변하지 않나봄....
마지막으로 보고온 쪽지 시험에서 시계 부분에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하하하하....
남자친구가 보고 엄청 웃던데.....  (나쁜넘.... )

이제 좀 손 놓고 있었던 폴란드어 포스팅 좀 다시 할수 있으려나....
아... 폴란드 음식도 좀 정리해서 포스팅 하고 싶은디....

10/04/2011

갈등

나쁜놈.... -_- 이라는 말만 떠오르는 지금.....

내가 욕먹으면서....(욕이라면 좀 과장이긴 하지만..... 아무튼 김치 담글때 집 난장판으로 해 놓는다고 쫌 구박 먹었던 기억) 김치 담궈 냉장고에 넣어두면 야근하고 돌아와서 가끔 냉장고를 열어 생 김치만 밥도 없이 집어 먹던 니가....

이제와서 하는 말이 뭣이라? 사실은 동양 음식 별로라고...

내가 요새 잘못이 많아 뭐라 말은 못했다만....  내 지금 느낀 배신감은 결코 잊지 않겠다.

일하면서 피곤에 쩔어서 김치 좀 먹어 보겠다고 어깨가 빠져라 담근 김치 훔쳐 먹어도 ( 자는 와중에도 사실 짜증이 좀 났었음, 저 쉑이가!! 하고 발끈 하였으나 그냥 자는 척....) 내 별 말 안했는데 나름 결혼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놈이 이런말을 하니 마음에 앙금이 깊이 남았다.

그런데 원래 결혼생활 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마음에 앙금을 안고 사는 걸까?


풀길이 없구만.... 쩝
 
아 왜 이렇게 다를까...
한국 사람은 말을 아끼는게 미덕인데... 여긴 무조건 대화로 풀고 무조건 말로 설명한다....
그런데 오히려 더 답답하네....



그런데 나는 왜 이 결혼을 하려고 했지? 하는 고민을 한달이 넘도록 하고 있을까....

8/19/2011

깜짝 선물

퇴사 전의 깜짝 선물인가....
원래 우리 팀은 출장 갈일이 별로 없는데 갑작스럽게 한국 출장이 잡혔다. 그것도 당장....
퇴사 한달전에 출장 가는 오묘한 이 기분..


할 일도 많은데 심정이 복잡하다.
(사실은 돈이 없다...)
외국에 나와 있다가 한국에 들어가는 다른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부담이 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의 애정 어린 시선....... 좋지만 가끔은 불편할 때가 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지만...비슷한 나이 또래의 딸을 둔 자매들의 약간의 경쟁 의식이랄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어떻게 사나 궁금해 하시는 이모들의 질문에 잘 대답 해야 하고....
또 돈을 버는 입장이니 선물도 사가야 하고....
뭔가 미묘한게 많다.

나보다 먼저 외국에 나가 10년을 살았던 사촌 언니가 한국을 드나들며 이모 선물만 사고 다른 이모들 선물은 단 한번도 사온적이 없다.
친 언니처럼 사랑하는 언니지만.... 그 모습을 보며 개인적으로 느낀바가 많다.
대단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애정을 표시하는데 선물 만큼 좋은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속물적이다 또는 체면치레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갈 때면 꼭 선물을 사 들고 가고 싶다.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엄마에게 맛있는 밥도 사주고 싶고.... 또 친구들도 만나고 싶으니.... 갑작스러운 한국 방문은 늘 예상치 못한 지출이 따른다.
그리고 호텔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러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갑갑....

장시간의 비행도 그렇고.... 시차가 적응 되기도 전에 빡세게 일할걸 생각해도 갑갑....


곱창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도 많은 위로가 된다...
당장 내일 아침 비행기 탈 생각을 하니 가슴이....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