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2012

김장의 묘미

바르샤바에서 산지 2년 6개월, 당연히 늘어야 할 폴란드어는 잘 안 늘고 김장 실력만 나날이 늘어 간다.
한국에서 남동생 3명 둔 죄(?)로 필요에 의해 다져진 요리 경험 덕분에 밥은 잘 챙겨 먹지만, 손이 커져서 독신 생활을 시작했건만 요리를 한번 했다 하면 1~2인분이 아니라 4~5인분 요리를 하게 되어 고민이 컸다.
한창 요리를 하던 때는 내가 어리고 솜씨가 별로 없었던 터라 마른 반찬 같은 걸 잘 안해먹어서 이모들이 나물 반찬 챙겨주는 것 이외에는 늘 일품 요리 또는 전골등을 하나 크게 해서 밥과 먹곤 했는데,  남동생들이 워낙에 반찬 투정을 안하고, 남김 없이 다 먹어치우는 지라 집에 음식이 남는 날이 없었다. 남는 양념까지 밥위에 척 올려 김을 싸먹는 싹수를 발휘하시던 동생 분들 덕분에 나는 식탁 매너가 별로다. 입도 짧고 음식에 빨리 질려 한가지 음식을 많이 못 먹는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가 정말 맛에 금방 실증을 내기 때문이다.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닌듯 한데 그래서 늘 음식을 남기게 된다. 전에야 동생들이 다 먹어 줘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후로.... 이 부분이 참 마음에 걸린다. 동생들 덕분에 집에서 살 때 음식물 쓰레기는 요리하다 나오는 부산물 정도 였는데, 크게 음식을 하다 혼자 먹을 음식을 하려니 늘 양 조절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잠시 딴소리를 좀 하자면...양희빈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나의 폭압에 눌려 맛에 상관없이 해주는대로 잘먹고 상 차리기도 잘 하고, 요리하다보면 볶거나 써는 등의 잔 심부름도 잘하고 또 뒷 정리도 잘하고 (본인은 늘 요리만 하고 뒷 정리는 동생들이....투정 부리면 밥 없다고 늘 으름장.... 그런데 남자들은 정말 밥에 약한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치사하게 굴고 눈물 콧물 쏙 빠지게 혼내 놔도 음식 크게 차려 놓으면 헤헤 거리고 앉아서 누나가 최고라며 밥을 먹는 걸 보면....  아무튼 이런 동생들 덕분에 나는 참 뒷 정리가 서툴다.) 나중에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동생들과 결혼하는 자매 분들은 식사에 대해선 별 걱정이 없으실꺼라 예상 되는 바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럼 김치는 어떻게 먹었느냐....
나중에는 엄마네 세대도 동생둔 게 죄인지... 큰 이모가 크게 김장을 하셔서는 동생들에게 나눠 주시곤 하셨지만, 내가 어렸을 때 김장은 늘 아빠 몫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도 돕긴 하셨지만, 배추 절이는 거나 양념 만드는 등의 주된 역할은 아빠 몫이었다.
워낙에 민감 하셨던 분이라....
어렸을 때부터 온갖 잡일에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김장하는 날이면 옆에서 알짱 거리면서 대충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동참한 적은 없고 가끔 아빠가 실험을 하실때 (사이다를 깍두기에 처음으로 넣으시던 날 손을 덜덜 떠셨다는...ㅎㅎ) 옆에서 돕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김장을 하기 시작한 건 바르샤바로 이사하고 난 이후다.

처음 한국 배추의 3분의 1크기의 배추를 5포기를 사서 담그고 난 후에 몸살에 시달렸는데, 누워서 앓는 동안 50포기 100포기 김치 담그신다던 큰 이모 생각이 많이 났더랬다.  8남매의 큰 누나면 (물론 오빠가 위로 두분 계시긴 하나)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가보다.. 하고
그래도 다행히 이것 저것 만들어 본 가닥이 있어서인지 맛은 좋았다.
서양 배를 갈아 넣어 약간 떫은 맛이 느껴지긴 했지만 천일염도 아닌 암염으로 담근 김치이건만 다행히 쓴맛은 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두 세달에 한번씩 서너포기를 담궈 먹은지 어언 2년, 그 사이에 오이 소박이도 여러번 담그고 양배추 김치도 담궈 보고 파김치도 담궈 보면서 서서히 내공이 쌓여 가는 것 같아 스스로가 조금 대견하다. ㅎㅎ
처음에는 옆에다 인터넷 창 여러개 띄워 놓고 레시피 비교해 가면서 재료 하나 떨어지면 패닉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 사오면서 담궜는데 요새는 대충 감으로 배추도 절이고 양념도 재료 하나 없어도 다른 걸로 대체해 가면서도 잘 만드는 걸 보면 역시 요리는 감이야..... 이러면서 흐뭇해 하고 있다.
신난한 타향 살이 이런 작은 기쁨이라도 없으면 어쩌나 싶다.

그렇게 어제 다시 오이 소박이, 파김치, 배추 김치를 담그고 기쁜 마음에 오늘은 돼지고기를 삶았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손주들이 놀러가면 돼지고기를 삶아주시곤 하셨는데 생강과 누런 콩을 넣어 삶아 내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다들 좋아서 무채를 듬뿍 올려 입안으로 가져가기 바빴다.
오늘 그 생각이 나서 냉장고에 있던 된장 조금, 생강에 양파 껍질을 넣고 어제 김장하다 남은 배 반쪽을 넣고, 노란콩이 떨어져 그냥 검정콩을 넣고 삶았는데 그 맛이 어린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맛이었다.
어제 잘 담근 김장 김치가 살포시 익어 오늘 점심은 정말 진수 성찬이 따로 없었다.

폴란드 돼지가 참 맛있다.
왜 그럴까?
전해지는 말로는 투르크 족이 침략해 왔을때 먹을 만한 것들은 싹다 잡아가고 자기들이 안 먹는 돼지만 남겨 두고 가서 돼지를 재료로 한 음식이 발달 되었다 하는데 그거야 요리법이 잘 발달된 거고 돼지 맛 자체가 좋은 건 무슨 이유일까?
폴란드의 자연을 생각해보면...땅에 석회질이 많아 감자가 맛있다는 것, 추운 겨울이 길고 해 나는 날이 적다는 것? 날이 추워 돼지들이 양질의 지방을 축적하나?
맛있게 먹으면 될일을 참 별 생각을 다하고 있다.

참고로 폴란드 돼지 목살을 사서 구으면 기름이 거의 안나오고, 삼겹살 부분을 사도 한국에서 구울때 나오는 기름의 반의 반도 안나온다. 이건 왜 일까? 궁금하다.
아 그리고 여기는 냉동 고기 파는데 없다. 물론 찾아 보면 있겠지만 동네에서 찾아 보기 힘들고 대부분이 생고기다.
싱싱해보이는 고기 사와서 양념없이 소금만 쳐서 구워도 그 맛이 기가 막히다.

김장으로 냉장고가 가득차서 그런가 마음까지 부자가 된 기분이다.

댓글 9개:

  1. 삼바 탱고 엄마14/5/12 11:03

    와우 대단한 정성이야.. 엘레스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나는 혼자 산지 벌써 8년도 더 됐지만 김치는 도저히 게으른 몸뚱아리가 안 움직여져서 못하겠던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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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주말에 할일도 없고 해서, 드라마 다운 받아서 틀어 놓고 음식 해 먹는 재미에 산답 ㅎ
    그런데 늘 남아서 걱정이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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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쏘이라떼4/6/12 19:08

    대단해 대단해- 게다가 저 돼지고기 묘사 군침이 절로 난다.
    돼지를 대량생산 안하고 풀어키우나부다, 지방이 적당히 퍼져있나봐. 생고기로 유통하니 맛도 좋겠구.. *_* 츄룹
    싼 고기일수록 냉동했던 고기일수록 기름과 물이 많이 나오드라구.
    나 놋북 로맷한 후로 블로그 주소 못찾아서 뒤지다 뒤지다 겨우 찾아와서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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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언닝

      나 진짜 그동안 완전 블로그 방치 했었는데... 주인도 방치한 블로그를 찾아 주시다니... ㅎㅎ 감샤
      요새 여기 저기 일도 많고 이상하게 다닐 일도 많아서 집에서 거의 밥을 못 먹었더니 김치고 뭐고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어요 ㅎ
      언니랑 같이 김장하고 돼지고기 삶아 먹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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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부엉이2/8/12 21:56

    와~ 대단하십니다. 김장까지 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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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다보니 늘더라고요....
      이제야 겨우 좀 먹을만 합니동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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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우와 바르샤바 사시나봐요..언제 한번 만나면 재밌겠어요~~~저도바르샤바 살고있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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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카톡있으시면 연락한번 주세요ㅎ.. dhhhh2 카톡아이디 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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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 안녕하세요.
      바르샤바 사신다니 반갑기는 한데, 죄송하지만 인사 나눈적도 없고 어떠한 정보도 주고 받은적 없는 사람을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카톡으로 연락해서 만나는 행동은 제 생활 패턴을 벗어나기 때문에,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잘 생활하고 계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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