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먼저 손을 잘 내미는 편이다.
염치 없이 보일 때도 있지만, 나쁜 기분 같은 건 금방 풀어 버릴수 있다.
누구에게나 운수가 사나운 날이 있기 마련이고, 이유 없이 우울하고 짜증 나는 날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나와 어느 정도 시간을 같이 해본 사람들은 아마 나를 변덕이 심하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화가 나서 씩씩 거릴땐 언제고 금새 풀어져서 살랑살랑 거린다고 말하는 것도 들어 본적이 있다. 심지어는 남자친구도 나에게 이해하기 참 힘든 성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나쁜 기분을 오래 끌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상황이라면 관계를 단절할 필요도 있고 거리를 두는 방안도 나쁘지 않지만 항상 좋을 수 만은 없는게 사람 관계니까...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다 하고 배척하다보면 주변에 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무인도에 들어가서 살게 아닌 이상 나는 이 곳에서 잘 적응하고 싶고 보다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고 싶다. 그래서 마음을 잘 고쳐 먹게 되는 거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했는지도 몰라........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어쩌면 그게 최선 이었을지도.......
내가 먼저 다가가면 잘 지낼수 있을꺼야, 누구나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하는 그런 생각에 서운하고 화가 나더라도 금새 다시 웃고 얘기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연은 맺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내게 언젠가 외할머니께서 인연은 잘 푸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 하신적이 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한 십 오년을 계속 곰 씹기만 했는데 얼마전에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듯 이게 바로 그때 할머니께서 나에게 하고 싶으셨던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오늘 쓰는 이야기는 내가 어렸을때 우리 외할머니께 들었던, 인연을 푸는 것에 대해 깨닫게 된 계기에 대한 거다.
내가 어렸을때 외할머니께서는 참 정갈한 분이셨다.
며느리들에게는 달랐겠지만 나에게는 늘 정갈하고 단정한 모습의 외할머니로 기억에 남아있다. 할머니들은 곧잘 내가 이해할수 없는 나름의 인생철학에 대해 지나가듯 말씀해 주시곤 했는데, 친할머니는 관상에 관련해서 많은 얘기를 해 주셨고 외할머니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늘 혼잣말 하시듯 내게 조곤조곤 말씀해 주셨다.
시장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시던 할머니께 빨리 집에 가자고 졸라대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얘기하고 대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었다.
경제학에서 늘 중요시여기는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처럼 비효율적인 삶이 없겠지만, (그런면에서 우리 친할머니는 참 효율적인 삶의 방식을 갖고 계셨던....) 그래서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늘 따뜻하고 다정하고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장에서 오이지를 직접 담궈서 팔던 욕쟁이 할머니를 싫어 했던 내게 외할머니는 네가 이해할수 없는 세월을 보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었다..... 그리곤 늘 그 할머니에게 오이지를 사면서 말을 주고 받곤 하셨다. 내가 보기엔 대화라기보단 욕쟁이 할머니는 욕을 하고 외할머니는 웃으면서 들어주시는게 다였는데도 말이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365일 같은 자리에서 늘 변함없는 맛의 오이지를 파셨던 그 할머니의 삶속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인한 삶에 대한 자세가 들어 있어던것 같다. 그리고 외할머니께서는 그런 오이지 할머니를 잘 이해하고, 또 험난한 삶을 헤쳐온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깊은 공감대를 느끼고 계셨을지도....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욕을 해도, 소리를 질러도 '자네 왜 그리 화가 났는가~ ' 또는 '그런가? ' 하고 대답할 뿐 맞서지 않으셨다. 묵묵히 듣고 넘기시는 그 모습이 나는 참 답답했고 싫었다 그리고 화도 났다. 당신의 삶에 대한 자세가 바로 할머니께서 결코 평탄치만은 않은 삶을 살았던 이유였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절대 할머니처럼 살지 않을 꺼야!! 하는 말을 속으로 얼마나 되뇌였는지 모른다. 내가 화를 내고 할머니 역정을 들라치면 나를 말리며 하시던 말이 '그만 해라 저 사람 속은 얼마나 문드러지겄냐' 셨다.
그랬던 외할머니는 어느날..... 여느때와 같이 집에 돌아가셔서 술을 한잔 하시고는 방에 들어가 잠이 드셨고 그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으셨다. 별 다른 징후 없이 그대로 편안하게 가신 것이다. 염하는 사람이 한이 많으신 분들이 돌아가시면 염하기도 힘든데 보기 드문 호상이라고 이렇게 돌아가시는 것도 할머니 복이네요 라고 얘기 했다.
막상 내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자꾸만 외할머니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내 이야기 같은 건 외할머니의 인생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이겠지만 꽃이 지나간 자리에 그 향기가 남듯이 어쩌면 할머니께서 말씀 하셨던 의미에 대해서 그 실체가 없어도 향기로 짐작 할수 있듯 조금이나마 내 삶속에서 자꾸만 흐려져 가는 그 향기를 쫓아 가다보면 언젠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 이야기로 들어 가자면......
지난주 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남자친구와 함께 haarlem에 갔다.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기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다. 좁은 골목, 수많은 사람들, 트램, 자동차, 버스 등 자전거의 속도에 비해 변수도 많고 위험도 많다.
1인용 자전거로도 지나가기 쉽지 않은 그 곳을 2인승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려니 엄청 부담이 되고 힘도 들었다. 자전거 자체도 무겁고, 페달도 둘이 맞춰서 밟아야 하고, 길이도 길어서 방향 전환도 쉽지 않고, 또 신호등은 어찌나 그리 많은지.....
그래도 다행인건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복잡한 도심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그리 많겠지....
우리는 일부러 먼길을 택했다. 숲도 거치고, 강변도 거쳐서 스키폴 공항 언저리를 지나 겨우겨우 도착했다. 따가운 햇살에 지친 우리는 시원한 맥주를 찾아 돌다가 눈에 들어오는 노천 까페에 자전거를 세우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10분이 지나고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 젊은 웨이터들.... 인상도 험하고 등이 땀으로 젖은 상의....
그렇게 15분이 지났고.... 그냥 일어나서 다른데로 가자는 남자친구 말을 거부하고 벌떡 일어나 걸어가 화장실이 어디예요? 하고 묻고는 우리 조금 오래 기다렸는데 저기 테이블로 맥주 중간 사이즈로 두잔만 가져다 주세요 하고 말했다.
오케이~ 하길래 화장실에 갔다 테이블로 돌아갔더니 남자친구의 반응, 궁시렁궁시렁..... 주문하는데 15분 걸렸으니 가져다 주는 건 30분 걸리는거 아냐? 툴툴툴
하지만 맥주는 금방 가져다줬다. 둘다 워낙에 목이 말랐던지라 단숨에 컵을 비우고 계산 하려는데 또 10분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다시 남자친구 툴툴툴.... 다른데 가자고 했잖아.....
여기 정말 서비스 별로다 네덜란드, 진짜 별로야....Haarlem 다시 안 올것 같아 툴툴툴
속으론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가? 왜 그럴까? 여행객이라 별로 돈 안될것 같아서 그런가? 하고 별 생각을 다했지만 아무말 않고 남자친구의 불평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옆 테이블에서 웃던 말던 손을 번쩍 들고 기다렸다. 웨이터는 이쪽을 확인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2~3분 후에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나는 무심결에 계산을 하는 웨이터에게 말을 걸었다.
' 이런 날씨에서 일하려면 힘들지? 특히 이 시간엔 눈도 부시고~ 일하는 사람도 별로 안보이는데 혼자서 여길 다 서빙하는 거임?' 했더니 금새 그 웨이터의 험악한 표정이 풀어지면서 너무 힘들다고 얘기 하면서 다른 애들이 일을 열심히 안해~ 나도 쉬고 싶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 ' 이런 날에 서비스 업이란 너무 잔혹해~ 그것도 마음 안맞는 동료랑...' 하고 어깨를 으쓱~ 했더니 활짝 웃어주더라 미안했는지 아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라고 말하는데..... 그때까지의 부정적인 느낌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래 너무 무척 힘들꺼야....힘내 화이팅~ 하는 동감 같은게 느껴졌다.
까페를 떠나면서 남자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의 마지막 그 태도가 의미하는바가 뭐야? 뭘 얻고자 한거지?
그때는 별 생각 없이 ' 나쁜 감정을 남기고 싶지가 않았어,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면 아마 그 상태에서 끝났겠지~ 걔는 가뜩이나 힘들고 기분 나쁜데 웬 여자애가 와서 나한테 주문 안받는다고 뭐라고 했다. 하고 뇌에 입력 할꺼고 나는 네덜란드애들 진짜 짜증나 나 동양인이라 주문 늦게 받았나? 하는 생각 가지고 그 장소를 기억 했겠지~ 그러기 싫었어.
거기에 잠깐 앉아 있는 나도 짜증나는데 땡볕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일하는걔는 오죽 힘들었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그냥 말 걸어본거야. 어차피 나는 노는 중이고 걔는 일하는 중이니까.... 내가 배려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말거는 순간부터 이곳은 서비스 나쁘고 짜증났던 까페가 아니게 된거지 그래서 지금처럼 우리 둘다 좋은 기분으로 여길 떠날수 있는 거고~
나중에 이곳을 떠올려도 나는 기분이 좋을 것 같아. 누군가와 소통을 했던 장소로서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 동양인 손님으로서 차별 당했다고 오해하고는 기분 나빠하기 보다는 말이야~' 하고 대답했다. 별 생각 없이 말을 시작했는데 말하는 도중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때 할머니가 그래서..... 그렇게 내게 말씀 하셨었구나! 하고..... 나는 방금 잘못 얽힐뻔한 인연의 고리를 잘 풀어서 놔주었구나! 하고 말이다.
남자친구는 흥미로운 시각이긴 한데 그렇게 작은 것까지 신경쓰고 살다보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글쎄..... 그럴지도 하지만 난 방금 우리 외할머니가 말씀 하셨던게 뭔지 깨달았어. 내가 계속 이런 삶의 방식을 추구할지 아닐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방금 돌아가신 할머니랑 교감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알수 없는 느낌이 들기도 해
하고 대답한 다음 ????? 의 얼굴을 한 남자친구에게 웃어주고는 우리의 대화를 마쳤다.
내 남자친구의 참 좋은 부분중 하나..... 내가 말을 멈추면 기다려준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더 이상 말을 하면 그 느낌이 날아갈까봐 그대로 있었는데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반납하고 들어간 타이 음식점에서 남자친구가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외할머니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줘 하고.... 그 후로 장장 2시간에 걸쳐 긴 식사를 하고 외할머니와의 추억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삶을 살면서 한해 한해가 갈수록 과거에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부분들을 발견하곤 한다.
마치 물랑루즈 영화를 3번째 보던때 눈에 들어오던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춤을 출때 나오던 노래가 사실은 밤하늘에 떠있던 달이 불러주던 노래였던 걸 발견 했을 때 처럼.....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나는 좋아하는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성향이 있다. 물랑루즈는..... 10번 정도? 어쩌면 15정도 본 것 같다.)
그럴 때면 삶의 깊이가 조금씩 깊어져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내 인생의 깊이라고 해봤자 아직은 고작해야 30cm 발목 언저리에 닿는 시냇물 같겠지만 계속 가다보면 어느 순간 강이 되고 바다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하는 마음으로 산다.
오늘은 오랜만에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그리고 외할머니 얘기를 나눠야지......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기억 안에서 새로운 모습의 외할머니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 또한 무척 기쁠것 같다.
어떤 인연을 만났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인연을 풀어내는게 중요하다....
답글삭제이말이 너무 좋아서 다른 어떤 말도 할수가 없네요.
앞으로 인연을 잘 풀어내도록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